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종 독살설 (문단 편집) == 결과 == 독살설이 사실인지는 거짓인지와는 무관하게 영조는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 때문에 매우 고생했다. 실록에만 기록이 안되었다 뿐이지 게장을 올린게 영조라는 사실은 온 나라에 다 퍼져있던 사실이며, 어의 이공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조가 인삼과 부자를 처방하게하고 그걸 먹고 얼마 뒤 경종이 사망했다는 사실도 의혹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경종이 혼수상태에 빠졌을 당시, 미음이 진상되어 의식을 잃은 경종에게 올려졌는데 하필 이 미음을 쑨 사람이 [[정성왕후|세제빈 서씨]]인데다가 그걸 수저로 떠서 경종에게 먹인 사람이 영조였기 때문에 이거 가지고도 오만가지 소문이 돌았다.] 게다가 신임사화 때 주모자들이 경종을 독살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는 점과, 그 주모자들이 당시 왕세제였던 영조와 가까운 사람들이라는 정황 때문에 소론을 중심으로 '왕위를 노리던 영조가 끝내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당대의 시각으로도 그다지 떳떳한 행위가 아니었다는건 실록과 영조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위의 인삼과 부자 처방과 달리 누가 게장과 감을 진상했는지는 실록에 누락되어있다. 정말로 영조 본인이 봤을 때 문제가 없는 행위였다면 사관들도 '영조가 게장과 감을 진상했다'고 마음 편히 기록해두었을 것이다. 영조 치세에 역모사건과 반역을 일으킨 사람들이 했던 발언들을 전부 직접 실록에 적지 못하고 미묘하게 돌려적어서 현재까지 내려오도록 만든 것도 마찬가지다. 그 시작은 김일경이었다. 영조 즉위년(1724) 12월 8일, 영조가 즉위하고 얼마 뒤에 소론이던 김일경과 목호룡을 [[국문]]했는데 이때 김일경은 이상한 행보를 보였다. 김일경은 자신을 경종의 충신이라고 자처하고 영조에게는 자신을 지칭할 때 의신(矣身)이라는 존대말 대신 '''나'''를 뜻하는 오(吾)라는 반말을 쓰는 등, 흡사 [[육신전]]에서 [[세조(조선)|세조]]를 부정하던 [[사육신]]과 비슷하게 행동했다. [[승정원일기]]의 기록은 더 노골적이다. [[이세황제|호해]]와 [[태종(당)|이세민]]이 형제를 살해하고 비정상적으로 왕위를 승계했던 사건들을 들어가며 영조를 비판했고, 여기에 내옥척련(內屋戚聯)이라는 궁인과 영조가 내통했다는 단어를 써가며 경종이 독살되었단 생각을 노골적으로 떠들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김일경이 영조를 지지하던 노론을 숙청한 인물이었고, 국문으로 고문받던 상황이니 어느 정도 설명이 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김일경을 숙청한 뒤 한 달이 겨우 지난 이듬해 1월 16일, 영조가 의릉(경종의 릉)에 알릉(참배)하러 가는 행찻길에서 군사(軍士) 이천해(李天海)가 경종 독살을 운운하며 고함을 지르는 사건이 벌어졌다.[* 한편 영조실록에는 '형조가 조사해보니 이천해가 광병(狂病)을 앓는 것으로 보인다'는 언급도 나와있는데, 혼자 귀신에 홀렸다며 자해한 적이 있다던지, 조사 중에는 '아내와 그 가족이 작당하여 자신을 죽이려 해서 그것을 상언하려고 그랬다'며 횡설수설 했다던지 하는 묘사가 꽤 들어맞기는 한다.] 다음날 이천해를 국문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이천해는 16일에 "국가가 무상(無狀)하다(질서가 없다)."를 시작으로 "환국(換局)을 어찌 하겠는가?"라고 따졌는데, 한 달 전 소론 강경파 숙청을 언급한 것 같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천해는 영조가 경종을 독살한 죄인이라고 언급하면서 자신을 독살범 영조를 고발하는 고발자라고 자칭했다. 영조는 이천해가 독살을 암시하여 "(영조가) 대궐 안을 왕래했다."라고 한 발언에 극도로 분노해서 "음참하여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어서 입에 담을 수가 없으니, 좌우의 사관(史官)은 쓰지 말아야 한다."라며 사관들을 압박했다. 결국 이천해가 영조에게 경종을 독살했다고 한 발언은 이날 기사에는 쓰이지 못했다. 다만 사관들이 나중에 신치운의 발언을 기록하며 이때 일을 은근슬쩍 인용함으로써 후세에 알려졌다.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3105021_001|#]] 또한 조사 결과 이유익의 입을 통해 이천해의 흉언을 퍼트린 주범이 경종의 첫번째 왕후 [[단의왕후]]의 동생 심유현이라는 얘기가 나와 심유현이 조사를 받았다. 심유현은 경종이 승하할 때 입시하여 그의 죽음을 확인하는데 참여하였고, 경종이 목욕할 때도 입시하였는데, 멀쩡하던 임금이 갑자기 사망해 의구심을 가졌고 이 얘기를 퍼트렸다. 그후 이유익, 심유현은 이인좌의 난에 동참했고 이유익은 국문을 받으면서 심유현의 증언이 민심을 선동하여 역모에까지 이르렀다고 한 바 있다. 이천해의 국문 당시 심유현은 외척이여서 별다른 처벌도 받지 않고 관직도 제수받았지만, 훗날 [[이인좌의 난|이인좌와 결탁해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해 끝내 주살되었다. 그나마 집안이 좋아 심유현만 처리되는 선에서 끝냈지만 이것도 당시 심유현의 모친, 즉 경종비 단의왕후 심씨의 어머니가 생존해 있었기에 대역죄인임에도 관례대로 노적, 즉 처자를 노비로 삼는 형벌을 시행하지 못한 것이다. 다음 독살설 관련 사건으로는 영조 4년(1728)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이 있다. 일단 영조실록 안에는 이인좌가 경종의 독살설을 주장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우선 해당 반란의 주범 중 박필현, 이유익, 이인좌는 경종 독살설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인물이고,[* 앞에서 언급한 이천해 사건의 배후도 이 3명이고, 반란 진압 후 이인좌와 다른 주범인 이익관의 증언으로 확인되었다.] 더불어 반란 당시 한양에 뿌려전 반란군의 격문에도 납일초주(臘日椒酒)[* [[왕망]]이 납일(臘日, 동지로부터 세 번째의 미일)에 독을 넣은 초주(椒酒, 후추를 넣은 술)로 [[평제]]를 독살한 것을 말한다.], [[사왕]]·[[후폐왕(주)|숙대(叔帶)]][* 둘 다 '''왕위를 노리고 제 형을 위해한''' 인물들이다. 종합하자면 각각 영조를 두고(이인좌 측 주장에 따르면) 목호룡의 고변 때 형 경종의 아량으로 살려줬는데 '형의 왕위'가 탐이 나 '독을 썼다'고 직설적으로 공격하는 말이다.]를 운운했으며 이런 선전문을 담당했던 이익관을 심문할 때 위에서 독살설을 운운한 이천해를 언급한 일로 보아 이인좌의 난 때도 경종 독살설이 주요 원인이었고 반란군도 이 독살설을 적극적으로 유포한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충청도 감사(忠淸道監司)와 병사(兵使)·수사(水使)가 적들이 흉관(凶關)·흉격(凶檄)을 여러 고을에 투입한 것을 올리니, 모두 불태우라 명하고, 그것을 지니거나 전하는 자는 참하라고 유시하였다. > >사신은 논한다. 흉격(凶檄)의 조어(措語)는 본디 마땅히 곧바로 쓰고 숨기지 말아서 흉적이 천일(天日)을 욕한 죄를 드러냈어야 한다. 아! 유봉휘(柳鳳輝)·김일경(金一鏡)의 무리는 우리 성상께 신하 노릇을 하지 않은 지 오래이다. (중략) 대개 심유현은 궁액(宮掖)의 척속(戚屬)으로 성품이 본시 간특하여 항상 분에 넘치는 바람을 품었는데, 박필현(朴弼顯)과 이유익(李有翼)이 그의 사특한 마음을 알고 이익으로 꾀어 마침내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 등 여러 적으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켜 대궐로 향하게 했던 것이다. 흉한 격문이 도로 위에 교체(交替)해 나돌았는데, '''심지어 ‘납일초주 사왕숙대(臘日椒酒思王叔帶)’ 등의 말을 함부로 쓰기도 했다'''. 이는 실로 천고에 없는 흉역(凶逆)이며, 그 원두(源頭)를 추구해 보면 모두가 당론(黨論) 속에서 나온 것인데, 유봉휘와 김일경이 그 괴수가 되고, 박필현과 심유현이 다음이 되며, 이인좌·정희량 등 여러 적에 이르러서는 호서(狐鼠)의 무리에 불과했으니, 족히 말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 >《영조실록》, 영조 4년(1728) 3월 20일자 기사 여담으로 '이인좌의 난' 당시 반란군의 격문 내용은 영조에게도 보고가 올라갔는데, 영조는 죄다 불태우라고 명했다. 하지만 사관은 이런건 죄다 기록해서 역적의 죄를 만천하에 드러내야 한다고 하며, 불태우라고 명한 기사에 주석으로 '납일초주 사왕숙대'라는 핵심 내용을 핀포인트로 적어놨다. > 신치운이 말하기를, "'''신은 갑진년(1724, 경종 사망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逆心)이며,''' 심정연의 흉서 역시 신이 한 것입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분통하여 눈물을 흘리고, 시위(侍衛)하는 장사(將士)들도 모두 마음이 떨리고 통분해서 곧바로 손으로 그의 살을 짓이기고자 하였다. >---- >《영조실록》, 영조 31년(1755) 5월 20일자 기사 영조 31년(1755)에 터진 [[나주 괘서 사건]]에서도 경종 독살설이 기록되었다. 심지어 주범인 신치운은 영조 앞에서 대놓고 게장을 언급하며 그를 경종의 암살범이라고 타격하고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신치운의 발언은 나주 괘서 사건과는 별개의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다. 위의 발언은 나주 괘서 사건 직후 이에 고무된 신치운을 비롯한 소론 강경파의 자제들이 과거장에서 국왕을 비방하는 글을 쓴 답안지변서사건(答案紙變書事件)을 일으키면서 추포되어 영조의 친국을 받는 자리에서 행한 진술이다.] 이 시기에 소론 준론과 남인들에겐 그냥 경종의 게장 독살설이 정설이었다는 반증. 영조 밑에서 승지를 지내기도 한 신치운은 저 극언 때문에 선대의 [[이괄]], 후대의 [[김옥균]]에 맞먹는 대역죄인으로 일가가 모조리 극형을 받았다. [[분류:조선]] [[분류:경종(조선)]] [[분류:음모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